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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책 리뷰

만들어진 신 - 극과 극은 통한다. '과학'이라는 종교의 이교도 대항 지침서

Ordinary

저자: 리처드 도킨스
출판사: 민음사
옮긴이: 이한음


나의 배경 1.

나는 비종교인이다.
가톨릭을 믿는 친가와 기독교를 믿는 외가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두 종교를 조금씩 겪었지만 여전히 비종교인이다.
 
자세한 이야기를 하자면 갓난 아기 때 이젠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대부에게 안겨 세례를 받아 엄연히 세례명도 있으며, 가톨릭 초등학교를 나와 정규 수업으로 '교리'를 학습했고, 매월 한 번씩 강당에서 조회를 할 땐 마무리로 찬송가를 부르곤 했다. 11살 즈음엔 주기도문과 여러 성경구절들을 외우며 첫 영성체를 받았더랬다. 그렇게 믿음을 품고 살았던 어린아이의 믿음은 정말 강력했다. 한창 학교와 성당에서 믿음을 갖고 있던 어린 나는 다른 이에게 말하면 코웃음 치며 헛소리하지 말라고 할 경험을 하기도 했다. 하교 후 동네 수영장으로 향하던 길에, 수영 수업시간에 늦을까 어머니가 싸주신 샌드위치를 채 다 먹지도 못한 채 반절정도를 휴지통에 버리고 막심한 후회를 했다. 황급하게 카운터에서 키를 받고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후, 간단한 샤워를 한 후에 수영장까지 뛰어내려 가면서 "예수님 죄송합니다. 어머니가 싸주신 일용할 식사를 버려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기도를 마음속으로 족히 10번은 넘게 읊었었다.

마침내 도착한 수영장 문을 열기 직전까지도 계속된 나의 기도에 예수님도 지쳤었는지, 나에게 '괜찮다. 괜찮다. 그만해라'라고 대답을 해주셨다. 그 대답이 남의 육성은 아니었던 것임은 분명했던 것이, 일반적으로 귀로 들리는 것이 아닌 머리로 들었기 때문이다. 머리가 울렸다고나 할까 아니면 머리에 작은 귀가 여러 개가 달려있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일반적인 청각과는 달랐다. 믿음이 충실했던 아이에게 그 사건은 매우 인상적으로 남아있으며, 지금도 냄새와 공간감각까지 생생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지금 비종교인인 현재의 나에게도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믿음이 뛰어났던 아이의 망상 혹은 꿈은 아니었을까?

고등학교 때는 가족들끼리 어머니의 뜻을 따라 잠깐 교회를 다닌 적이 있다. 초등학교 이후로 자연스레 귀차니즘에 엉켜 성당을 다니지 않게 되면서 종교정신으로 투철했던 나도 그 색깔이 대단히 옅어지고, 교회를 가더라도 종교심이 불타오르지도 않았다. 다만 아무것도 모르는 어렸을 때와는 달리 머리가 좀 큰 상태에서 설교를 들으니 수긍할 부분이 조금은 보였다. 그러나 교화가 아니라 수업을 들으러 가는 느낌이 더 강했다. 성경 구절 중에 한 부분을 따와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설해 주는 목사가 달변가라고 느껴졌다. 그는 지루하지 않게 중간중간 위트를 섞는 관록도 보이셨다. 이질적이었던 건 항상 목사님의 설교시간이 끝나고 이어지는 축도시간에 나치신도자처럼 한 손을 쳐들은 채 목놓아 자신의 죄를 울부짖으며 방언을 뱉는 신도들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때마다 좀처럼 적응을 하지 못한 채 눈을 감고 기도하는 척을 했었다. 지난 일주일간의 반성과 죄를 설토하며 눈물을 뚝뚝 흘리고서는 위안을 얻는 그들을 보며 종교는 일종의 정신적 서비스업이라는, 신도들이 들으면 매타작을 할 발칙한 생각이 들곤 했다.
 

나의 배경 2.

다른 얘기를 해보자면 나는 '개인'이라는 개념에 대해 명확한 신념이 있다. 나에게 있어 개인이라 함은 법에 위배되지 않는 한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어떠한 방식으로도 영향을 줄 권리는 없다'라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의미이다. 예시를 들자면, 친누나는 어렸을 때부터 주변 인물들, 그것도 자신과 평생 마주칠 일이 없을 이들에게 감정을 쏟곤 했다. 뉴스에 나오는 정치인이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큰 사건부터, 어느 부부 중에 누군가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식의 사사로운 사건이 보도될 때 밥 먹던 것을 멈추고 비난을 할 정도로 말이다. 물론 그 감정은 휘발성이 짙고, 그의 하루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것임을 안다. 하지만 나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감정의 표출이었다. 나는 검사장이 저지른 비리보다 당장 다음 순서로 먹을 밥 한 술과 어울릴 반찬을 눈으로 좇는 게 더 먼저였으며, 연예인이 일으킨 마약사건을 욕하기보단 다음날 학교에 가져갈 준비물을 기억하는 것이 더 우선순위였다.
 
개인주의 연장선으로, 본인의 의지가 없이 타인의 의도대로 변하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인생을 오래 살진 않았지만 여지껏 살면서 겪어온, 그리고 보아온 크고 작은 사건들의 절대다수는 한 개인이 다른 개인을/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자기네들의 입맛대로 바꾸려고 할 때 벌어져왔다. 어쩌면 살아오면서 겪었던 여러 갈등을 겪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때 '너를 존중할 테니, 제발 나도 존중해 줘'라는 마음에서 싹튼 신념일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마음이 장착되고 난 다음부터는 마음의 기조가 '그럴 수도 있지'에서 시작해 '그러든지 말든지'의 방관 혹은 무관심으로 진화해 왔다. 자연스레 남들보단 나, 내 가족, 내 사람들에게 많은 신경을 쓰고 타인에게는 나의 잣대를 들이지 않는 서양문화권에서의 '개인주의'를 추구하게 되었다.

아이돌, 스포츠등의 유년 시절부터 좇아왔던 파벌 싸움은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레 정치, 종교 등의 큼직한 싸움판으로 시야가 넓어졌다. 말초적인 재미를 위한 전자의 대결-물론 '진짜'들은 인생을 걸기도 하겠지만-을 넘어서서 후자의 싸움은 사람의 목숨을 판 돈으로 놓을 정도로 체급이 차이가 났다. 그때서야 문득 나의 개인주의 신념이 마냥 틀리진 않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처드 도킨스는 과격한/급진적인 무신론자로 '만들어진 신'을 통해 종교와 종교에 심취해 있는 종교인들을 매우 강하게 비난한다.(책의 원제가 The God Delusion-신이라는 망상임을 감안했을 때 번역이 매우 완곡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종교인을 포함한 학자, 정치인, 유명인 등 유신론자들의 주장 혹은 논증에 대하여 매우 염세적이며 동시에 염려가 될 정도로 냉소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아마 이렇게까지 차가운 그의 태도의 저변에는
1. 유신론자들의 정답을 정해놓고 그에 맞춰 빈약한 근거를 펼치는 오만함에 대한 과학자로서의 염증
2. 강하게 메시지를 전달하여 단 한 명에게라도 그의 진심이 닿아 종교에 과하게 심취해있는 이들을 구제하는 것
3. 아니면 그저 그가 유식하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주장엔 주장으로, 논증엔 논증으로 정면에서 반박하는 4 챕터까지의 내용들은 매우 흥미롭다. 인문서가 아니라 철학서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고, 정답이 없는 주제에 대해 치열하게 철학적 공방전을 이어나가는 것만큼 정신적으로 생산적인 활동도 또 없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더글라스 개스킹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명'과 도킨스의 '종교에 대한 6가지 핵심 논증'등이 그렇다.

하지만 챕터가 진행되며 강한 어조(단순히 강하다고 표현한 것은 완곡하게 표현한 것임을 알아주길 바란다)는 그의 의견과 주장을 설파하는 데에 있어서 긍정적인 영향도 존재하지만 600p가 넘어가는 분량 내내 이어지는 핏대세운 비난은 통렬한 쾌감과 함께 정신적 피로감 또한 몰아온다. 게다가 종교의 뿌리와 영향력을 논하는 중반부터 그의 맹비난과 주장은 설득력을 잃기 시작한다. 매 챕터 마지막마다 그의 주장 한 스푼과 종교를 대차게 비꼬는 특유의 끝맺음은 실소가 터졌던 초반과는 달리 점점 버티기 힘들어질 정도다. 타율도 낮기도 하고.



그는 챕터 6 도덕의 뿌리: 우리는 왜 선한가? 에서 도킨스는 인간이 선한 이유가 종교적인 교리 때문이 아닌 식욕, 수면욕, 성욕처럼 측은지심을 '본능'으로 가지고 있는 인간의 도덕성과 사회적 합의에 따른 것이라는 설을 내세운다. 꽤나 합리적인 추론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가 이어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의미가 없다' 라는 골자를 내세울 때 시작되는데, 그 발언과 동시에 그의 주장을 존중할 이유는 증발해 버리기 때문이다. 성악설 성선설 성악선혼재설과 같은 동양의 인본설도 아니고, 과학적으로 설명가능한 법칙도, 가설도 아닌 철학적 논제임에도 불구하고-그가 그토록 싫어하는 '종교인'들의 방법처럼-종교를 비난/흠집을 내리는 답을 정해놓고 가설을 이어 붙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의 이러한 성향은 마지막 챕터에서 화룡점정을 찍는다. 그는 '종교는 인간 삶에서 네 가지 주요 역할을 해왔다고 여겨진다. 설명, 훈계, 위로, 영감이 그것이다'라고 하며 이어 이전 챕터에서 계속해왔듯 여러 사례들을 들먹이며 정면에서 반박을 한다.
 
그중에 '위로'챕터에서 그의 답변이 가관이다. 읽으면서 눈을 의심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종교적으로 내세를 믿는 이들이 많은데, 종교인들은 막상 안락사나 조력 자살에 열렬하게 반대한다', '모든 살인은 죄라는 것이 공식적인 이유가 될 듯하다. 그러나 당신이 천국으로의 여행을 돕는다고 진심으로 믿는다면 왜 그것을 죄라고 판단하나?'

일순간 과학자에서 떼쓰는 어린이로 변한 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1. 인간의 자유의지가 아닌, 노화나 병으로 죽는 것과, 인간의 의지와 선택이 담긴 죽음의 도덕적 차이를 정말 모른 체하는 것인가? 정말 그렇다면, 자신의 주장을 늘어놓기 위한 편협한 사고 설정에 불과하다.
2.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데 옆에서 '새빨간 거짓말'을 하지 말라라고 일갈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자신의 주장은 100% 순수무결한가? 예를 들어 그 '선의의 거짓말'을 가지고 면죄부를 파는 부패한 종교인을 비판하려는 것이면 몰라도, 이런 식의 맹비난은 설득력의 후퇴만 야기할 뿐이다.
3. 저자 자체가 급진파/과격파 무신론자인 만큼 온건파 종교인들을 겨냥하고 만든 책이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그의 화법은 본인이 환멸을 느끼는 급진파/과격파 종교인들이 억지논리를 주장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한 꼬투리를 잡아서 전체를 매도한다던가, 개인적 사례들 모음집으로 일반화를 한다든가, 새로운 논점을 들먹인다던가 말이다.

그리고 그는 위로 챕터를 마무리하며 이런 말을 한다. '진정 어른다운 견해는 우리 삶이 우리가 선택한 만큼 의미 있고 충만하고 경이롭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삶을 정말로 대단히 경이롭게 만들 수 있다.' 종교가 주는 위로의 효과를 부정하는 것도, 과학적인 위로가 더 효율적이라는 것도, 종교가 주는 얕은 위로로 인해 더 큰 실망과 환멸을 야기할 것을 경고하는 것도 아닌 그저 종교인의 위로가 얼마나 얼빠진 것인지를 맹비난하는 것과 다름없으며, 종교가 주는 위안을 믿지 말고, 과학이 비물질적인 위안을 주는 것을 믿으라는 엄연한 이교도적 말씀과 다를 바가 없다.
 
맨 처음 상기했던 대로 나 자신도 비종교인으로서 마찬가지로 종교의 힘으로 위로를 받거나 하진 않을 뿐더러 창조설보단 다윈주의 진화론이 더 합리적이라고 믿는데도, 이 챕터는 전체적으로 종교에 대한 환멸에 저자가 자기 자신에게 잡아먹힌 것 만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가 그토록 싫어하던 종교인들의 앞과 뒤가 다른 주장, 결과를 정해놓고 이유를 찾는 이율배반적인 태도와 억지논리들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으니 그의 발언의 신뢰도와 호소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역시 '극과 극은 통하는 것인가'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어 영감파트는 개개인에 따라 다르다는 한 페이지 미만의 간단한 내용으로 갈무리하고 넘어가기에 이른다.

마지막 챕터에는 다윈주의의 신봉자답게 부르카로 가려진 매우 작은 시야를 다윈 덕분에 현기증이 날 정도의 새로운 이해가 쏟아져 들어옴을 알린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십계명에 따라 수많은 전쟁과 학살을 일삼았던 가톨릭, 이교도를 참수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이슬람을 언급하며 종교의 이면을 주창할 때는 '타 집단을 입맛대로 바꾸려고 하는 행위'는 지탄받아야 한다는 나의 신념과 맞물려 큰 공감을 일으켰다. 하지만 리처드 도킨스는 그가 그토록 싫어하는 종교인 행세를 한다. 그의 종교를 앞세우며 이교도들을 핍박하고 부정하는 것에 숨기지 않고 본색을 드러내며 말이다. 그 종교의 이름은 '과학', 다른 말로는 '다윈주의'이며, 그의 책 '만들어진 신'은 그 성서이다.



마지막에 들어서 고꾸라지는 그의 설득력과는 별개로, 그(혹은 무신론자)의 주장은 새로운 시선과 생각을 선사한다. 그가 말했듯이 '각성'을 하게 해 준다. 저자의 말마따나 페미니즘이 발생하면서 그동안 몰랐던 성별 간의 간극이라던가, 남반구에 사는 사람들이 쓰는 지도와 북반구에 사는 사람들이 쓰는 지도는 서로 뒤집혀있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기억나는 몇 가지만 뽑아보면 신학 특유의 몽매주의, 종교를 향한 사회의 지나친 존중, 성모 마리아를 비롯한 성경 내용의 수많은 오역, 그리고 지적으로 설계된 종교의 탄생배경 등등이 있다.
 
아쉬움이 있다면 '신은 없으며, 종교는 허상이다'를 대전제로 설정했기에, 보다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논증을 하지 못한 점이다. 합당한 비판은 하되, 수긍할 부분은 포용하는 전략을 취했으면 어땠을까 싶다.